일본, 범용 반도체 생산 확대 추진…‘경제안보 시대’ 제조업 공급망 경쟁 본격화
일본 정부가 자동차와 공작기계, 산업장비 등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범용 반도체의 자국 내 생산 확대를 위해 보조금 지원 대상을 넓히기로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달 중 관련 지원 요건을 개정해 투자 규모가 300억엔 미만인 중소 규모 사업까지 보조금 대상에 포함할 계획이다.
그동안 일본의 반도체 지원 정책은 TSMC 구마모토 공장 유치처럼 첨단 반도체 중심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AI 반도체와 첨단 미세공정 경쟁이 글로벌 산업 핵심 이슈로 떠오르면서 일본 역시 첨단 분야 투자에 집중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첨단 AI칩 못지않게 ‘범용 반도체’의 중요성도 다시 커지고 있다.
범용 반도체는 일반 소비자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실제 제조업 현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품이다. 자동차와 산업기계, 공장 자동화 장비, 가전제품, 의료기기 등 거의 모든 산업 장비에 들어간다. 화려한 AI GPU처럼 주목받지는 않지만, 공급이 끊기면 생산라인 자체가 멈출 수 있다는 점에서 산업계에서는 핵심 부품으로 여겨진다.
이번 지원 대상에는 압력과 온도 같은 물리 정보를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아날로그 반도체와 전자 제어 기능을 담당하는 MCU(마이크로 컨트롤러 유닛) 생산 기업 등이 포함될 예정이다. MCU는 자동차와 가전제품, 산업장비 내부에서 일종의 작은 컴퓨터 역할을 수행하는 반도체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자동차 산업에서는 MCU 공급 부족 문제가 이미 한 차례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코로나19 이후 발생했던 글로벌 반도체 부족 사태 당시 자동차 업체들은 차량 생산을 중단하거나 감산해야 했다. 단순히 최신 AI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비교적 오래된 공정으로 생산되는 범용 반도체 수급이 막혔기 때문이다.
당시 업계에서는 “수천만원짜리 자동차가 몇천원짜리 반도체 하나 때문에 생산되지 못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만큼 범용 반도체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제조업 전체를 움직이는 핵심 부품이라는 점이 다시 부각됐다.
일본 정부가 이번 정책을 추진하는 배경에도 공급망 불안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글로벌 산업 환경은 단순 경제 논리를 넘어 ‘경제안보’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 지정학적 갈등, 공급망 분리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각국 정부는 자국 내 핵심 산업 생산 기반 확보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일본은 과거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했던 국가 중 하나였지만, 이후 한국과 대만 기업들이 메모리와 파운드리 시장을 빠르게 성장시키면서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일본은 반도체 소재와 장비 경쟁력을 바탕으로 다시 산업 재건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일본은 자동차와 산업기계 분야 제조업 비중이 높은 나라다. 따라서 범용 반도체 공급 안정은 단순 IT 산업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제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사안으로 볼 수 있다. 첨단 AI 반도체만큼이나 공장 자동화와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반도체 확보가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이번 보조금 정책에는 일정한 조건도 포함된다.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일본 내 생산 능력을 30% 이상 확대하거나 해외 생산 공정의 30% 이상을 일본으로 이전해야 한다. 또한 반도체 수급 위기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일본 국내에 우선 공급해야 하는 의무도 따라붙는다.
이 같은 조건은 단순 산업 지원을 넘어 공급망 통제력 확보 목적도 함께 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과거에는 생산 비용 절감을 위해 해외 공장 의존도가 높아졌지만, 최근에는 “필요할 때 자국 안에서 얼마나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경쟁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 각국은 첨단 반도체뿐 아니라 기초 산업용 반도체 확보에도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통해 대규모 생산 지원 정책을 추진 중이며, 유럽연합 역시 공급망 자립 강화를 위한 투자 확대에 나서고 있다.
한편 범용 반도체는 첨단 미세공정보다 비교적 오래된 공정에서 생산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산업 현장에서는 오히려 검증된 안정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최신 공정만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특정 산업용 장비는 기존 반도체 설계에 맞춰 수년간 운영되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부품 변경이 쉽지 않다는 특징도 있다.
업계에서는 일본 정부의 이번 정책이 “첨단 반도체 경쟁”과 “기초 제조업 공급망 안정”을 동시에 챙기려는 전략으로 보고 있다. AI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지만, 결국 제조업을 움직이는 기반 부품 역시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국가 산업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본의 범용 반도체 생산 확대 정책이 실제 공급망 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중소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 확대를 얼마나 끌어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 글로벌 반도체 경쟁이 첨단 AI칩뿐 아니라 산업용 핵심 부품 확보 경쟁으로까지 확산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움직임은 다른 제조업 국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 본 콘텐츠는 공개된 기사 내용을 바탕으로 범용 반도체 구조, 글로벌 공급망, 경제안보, 자동차 산업 영향 등을 추가해 재구성한 해설형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