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팔아 번 돈, 유튜브·AI 사용료로 나간다…커지는 미국 서비스수지 적자의 의미
한국이 지난해 미국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흑자를 기록했지만 정작 서비스 분야에서는 적자 폭이 크게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수출이 늘면서 상품수지는 개선됐지만, 인공지능(AI)과 소프트웨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사용이 급증하면서 미국에 지급하는 지식재산권 사용료와 서비스 비용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무역수지 변화가 아니라 글로벌 AI 시대에 한국 경제가 직면한 새로운 구조적 과제를 보여주는 신호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수출은 늘었는데 돈은 다시 미국으로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5년 지역별 국제수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대미 상품수지 흑자는 1119억8000만 달러로 전년보다 증가했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 IT 제품 수출이 늘어난 영향이다.
특히 미국이 AI 산업 성장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고성능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수출 확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상품수지 흑자 확대만으로는 전체 그림을 설명하기 어렵다.
같은 기간 한국의 대미 서비스수지는 146억 달러가 넘는 적자를 기록했다. 이는 최근 수년 사이 가장 큰 규모 중 하나다.
쉽게 말해 물건을 팔아 번 돈의 상당 부분이 서비스 이용료 형태로 다시 미국으로 흘러간 셈이다.
AI 시대, 지식재산권이 새로운 무역 전쟁터
이번 서비스수지 적자 확대의 핵심은 지식재산권(IP) 사용료다.
AI 기술과 소프트웨어, 반도체 설계 기술, 플랫폼 서비스 등은 대부분 미국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기 위해 미국 기업의 특허와 소프트웨어, 운영 시스템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허 사용료와 상표권 사용료, 기술 로열티가 모두 서비스수지 적자로 반영된다.
최근 AI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AI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들도 관련 설계 기술과 소프트웨어 사용에 따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즉 AI 산업 성장의 수혜를 받는 동시에 미국 기술 기업에 대한 의존도도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유튜브·넷플릭스도 적자 확대 요인
서비스수지 적자에는 국민들의 일상 소비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튜브와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 서비스다.
과거에는 국내 방송과 콘텐츠 소비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해외 플랫폼 구독이 일상화됐다.
유튜브 프리미엄과 넷플릭스, 각종 클라우드 서비스 이용료가 늘어날수록 관련 비용은 해외로 지급된다.
이 때문에 디지털 서비스 소비가 증가할수록 서비스수지 적자도 확대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경제가 성장할수록 국가 간 무역의 중심도 상품에서 서비스와 지식재산권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미국은 기술을 팔고 한국은 제조한다
현재 글로벌 경제 구조를 보면 미국은 AI와 소프트웨어, 플랫폼, 반도체 설계 등 고부가가치 영역을 장악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반도체 생산과 제조 경쟁력에서는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제조업 중심의 수출만으로는 지식재산권 사용료 증가를 상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AI 산업이 커질수록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영향력도 함께 확대되고 있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오픈AI 등은 글로벌 디지털 경제의 핵심 인프라를 제공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이 생태계 안에서 사업을 확장할수록 서비스 사용료와 라이선스 비용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중국 적자도 확대
한편 한국의 대중국 경상수지 적자도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산 가전제품과 자동차 수입이 증가하면서 무역수지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은 중국을 대상으로 큰 폭의 무역 흑자를 기록했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중국 제조업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한국 기업들이 중국 시장에서 겪는 경쟁도 심화되고 있다.
특히 전기차와 배터리, 가전 분야에서는 중국 기업들의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AI 시대의 새로운 과제
이번 국제수지 통계는 한국 경제가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자동차와 반도체를 얼마나 많이 수출하느냐가 경쟁력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AI와 소프트웨어, 콘텐츠, 플랫폼 등 무형자산의 중요성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
상품수지 흑자가 유지되더라도 서비스수지 적자가 계속 확대된다면 국가 전체 경쟁력에는 부담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한국이 AI와 소프트웨어, 디지털 플랫폼 분야에서 자체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지식재산권 사용료 유출은 더욱 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결국 AI 시대의 무역 경쟁은 더 이상 공장을 많이 짓고 물건을 많이 파는 것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누가 기술과 플랫폼, 지식재산권을 보유하고 있느냐가 국가 경제의 새로운 승부처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통계는 한국 산업이 해결해야 할 과제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