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꾸 고기가 당길까?”…국내 연구진, 장이 뇌에 보내는 ‘단백질 부족 신호’ 밝혀냈다
고기가 갑자기 먹고 싶어지는 이유는 단순한 입맛이나 기분 때문만이 아니었다. 우리 몸의 장(腸)이 음식 속 단백질 부족 상태를 감지한 뒤, 뇌에 즉각 신호를 보내 특정 영양소 섭취를 유도한다는 사실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밝혀졌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2일 기초과학연구원(IBS) 마이크로바이옴-체-뇌 생리학 연구단 서성배 단장 연구팀이 서울대·이화여대 공동 연구팀과 함께 ‘장-뇌 축(gut-brain axis)’의 새로운 작동 원리를 규명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세계 최고 권위 과학 학술지 가운데 하나인 ‘사이언스(Science)’에 게재됐다.
특히 이번 연구는 단순한 식욕 메커니즘을 넘어, 앞으로 비만과 대사질환, 폭식 장애 치료 연구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학계와 제약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장은 제2의 뇌”…먹고 싶은 것도 조절한다
최근 의학계에서는 장을 단순 소화기관이 아니라 ‘제2의 뇌’로 보는 시각이 강해지고 있다.
장은 음식 소화만 담당하는 기관이 아니라, 몸속 영양 상태와 음식 성분, 장내 미생물 변화까지 감지하며 다양한 생리 반응을 조절한다.
특히 장과 뇌는 신경과 호르몬, 면역 신호 등을 통해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받는데, 이를 ‘장-뇌 축(gut-brain axis)’이라고 부른다.
최근 들어 우울증과 스트레스, 비만, 식욕 조절 문제까지 장 건강과 연결된다는 연구들이 잇따르면서 장-뇌 축은 전 세계 생명과학 분야 핵심 연구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번 연구 역시 “우리가 무엇을 먹고 싶어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장이 핵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미각 없어도 영양소 찾는다”…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연구팀은 동물이 단순히 혀의 맛만으로 음식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서성배 단장은 “동물은 미각 기능이 사라져도 몸의 에너지가 고갈되면 영양이 있는 설탕물을 스스로 구분해낸다”고 설명했다.
즉 혀로 맛을 느끼지 못해도, 음식을 먹은 뒤 장이 영양 상태를 감지하고 뇌에 신호를 보내 음식 선택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과학계에서는 장이 영양 상태를 감지한다는 사실 자체는 알려져 있었지만, 그 신호가 어떻게 뇌까지 전달돼 실제 ‘먹고 싶은 행동’으로 이어지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 연구는 바로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장이 단백질 부족 감지하면…뇌에 즉각 신호 보낸다
연구팀은 초파리를 이용한 실험에서 단백질 부족 상태가 되면 장 상피세포가 음식 속 필수 아미노산 결핍을 감지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CNMa’라는 펩타이드 호르몬이 분비된다.
흥미로운 건 장이 단순히 호르몬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빠른 신경 회로를 통해 뇌에 즉각 신호를 전달한다는 점이었다.
즉 몸이 단백질 부족 상태에 빠지면 장이 거의 실시간으로 “단백질이 필요하다”는 정보를 뇌에 보내고, 그 결과 고기 같은 단백질 음식에 대한 선호가 강해진다는 설명이다.
이후 CNMa 호르몬은 혈액 순환을 타고 천천히 뇌에 도달해 단백질 섭취 욕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역할까지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를 두고 “빠른 신경 신호와 느린 호르몬 신호가 함께 작동하는 정밀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배고프니까 다 먹는 게 아니었다”
이번 연구에서 또 하나 주목받는 부분은 영양소 선택 행동이다.
연구팀은 CNMa 신호가 단순히 전체 식사량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특정 영양소를 선택적으로 먹게 만든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특히 단백질 섭취를 유도하는 동시에 탄수화물 섭취를 촉진하는 뉴런 활동은 억제하는 현상이 관찰됐다.
쉽게 말해 몸이 단백질 부족 상태가 되면 무조건 많이 먹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영양소 위주로 식욕 방향 자체를 조정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연구가 폭식과 특정 음식 중독, 식이 행동 장애 연구에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초파리만의 현상 아니었다…생쥐에서도 동일 확인
연구팀은 이번 메커니즘이 단순히 곤충에만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라는 점도 확인했다.
포유류인 생쥐 실험에서도 유사한 장-뇌 축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특히 기존에는 단백질 결핍 반응의 핵심 호르몬으로 알려졌던 간 유래 호르몬 ‘FGF21’ 없이도 동일한 행동 반응이 유지되는 점이 확인됐다.
이는 장이 독립적으로 영양 상태를 판단하고 식욕 행동을 조절하는 별도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비만 치료제 연구에도 영향 줄 가능성
이번 연구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최근 폭발적으로 성장 중인 비만 치료제 시장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GLP-1 계열 비만 치료제는 장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작용을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위고비(Wegovy)와 오젬픽(Ozempic) 등이 있다.
다만 학계에서는 “자연 상태의 GLP-1은 체내에서 수 분 내 분해되는데, 어떻게 뇌까지 충분한 신호를 전달하느냐”는 의문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통해 GLP-1 역시 단순 혈액 전달이 아니라 장-뇌 신경 경로를 통해 작동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는 앞으로 비만 치료 접근 방식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부분이다.
현재 비만 치료제는 대부분 호르몬을 안정화해 뇌에 직접 작용시키는 방식인데, 향후에는 신경 회로를 조절하는 새로운 치료 전략도 가능할 수 있다는 의미다.
“비만 치료 패러다임 바뀔 수도”
전문가들은 이번 연구가 단순히 “왜 고기가 먹고 싶은가”를 설명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 식욕 조절 시스템 이해 자체를 확장시켰다고 평가한다.
최근 비만과 당뇨, 대사질환이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면서 식욕 조절 연구는 글로벌 제약 산업의 핵심 분야가 됐다.
특히 GLP-1 계열 비만 치료제가 폭발적 시장 성장을 이어가면서 장-뇌 축 연구 역시 더욱 중요해지는 분위기다.
서성배 단장은 “그동안 자연 분비 장 호르몬이 뇌와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충분히 연구되지 못했다”며 “이번 연구가 향후 비만과 대사질환, 식이 행동 장애 치료 연구의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이번 연구는 우리가 특정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욕구조차 단순 취향이 아니라, 몸속 장과 뇌가 끊임없이 정보를 교환하며 만들어낸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앞으로 장-뇌 축 연구가 어디까지 확장될지, 그리고 실제 치료 기술로 이어질 수 있을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